경남 하동군에 연고를 둔 석봉 김병태는 근현대사의 격변기를 활동기로 삼았던 유의(儒醫)로, 이제껏 공개되지 않은 『석봉유고』를 남긴 작가이다. 이 문집에는 유자이자 의사였던 김병태의 생전 행적이 발견될뿐더러, 그가 47세에 석봉정사를 건립하고 이 공간을 다채롭게 활용했던 정황이 드러나 있다. 이에 장남인 가헌 김상기 대로까지 연장된 석봉정사의 영건사를 추적함으로써, 92년에 달하는 이 건물의 역사를 우선적으로 소개하였다. 그런 다음에 김병태가 석봉정사를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던 정황을 다섯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자세하게 분석함으로써, 이 건물에 내재된 혼성문화공간적 특징을 규명하였다. 일단, 김병태의 경우 이 건물을 장수소(藏修所)이자 이업(肄業)[학습]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건립하였기에, ‘정사’라는 작명법을 취한 사실이 주목된다. 나아가 김병태는 석봉정사를 가내 서당인 가숙(家塾)으로 이용함과 동시에, 또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진료소로 삼기도 하였다. 나아가 김병태는 지기와 사돈들이 주축이 된 친목계인 뇌암계를 결성하고, 이곳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주선한 점도 눈길을 끌게 한다. 곗날에는 음주에 뒤이어 시를 창작하는 관행이 정착되었고, 그 결실인 「정사창화제십」으로 명한 미니 시편을 선보이게 되었다. 또한 김병태는 「산재일과」라는 연작시를 통해서, 그가 임한 석봉 경영의 주요 얼개를 묘사해 두기도 하였다. 이렇듯 연찬과 이업, 가숙과 진료소, 창작과 사교 활동이라는 제 국면에 걸쳐서 석봉정사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던 정황이란, 이 공간이 트랜스(Trans)-섹터(sector)에 준하는 특성을 발휘한 혼성문화공간이었음을 시사해 준다. 또한 그 이면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동참하고 있었다는 점에서,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원리에 관한 의미 있는 하나의 전범을 선보인 것으로 평가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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